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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글쓰기

신의 존재와 나의 일상

by Kyle Ausk 2024. 3. 27.

16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휴학계를 내고 NGO 모금대행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함께 일하는 분들 중에는 크리스천들이 대다수였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는 그들 중 여럿이 함께 다니는 한 대형교회의 심야 집회에도 가보고, 그들을 따라 당시 마포구 신수동에서 예배를 드리던 어노인팅의 목요예배에도 처음으로 참석해보았다. 처음에는 그들과 여러번 함께 가기도 했으나, 어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여럿보다 혼자있는걸 더욱 좋아하는 나는 이후에는 혼자서 어노인팅 집회를 찾아가곤 했다. 그 당시 어떤 어려운 마음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혼자 가서 조용히, 깊게,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예배를 드릴 때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같이 있는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때로 예배 도중 감정이 벅차올라 그렇게 하고싶을 때에도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들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혼자 찾아간 집회에서는 자유롭게 손을 들고 찬양하고 싶었고, 마음껏 울고 감격하고 싶었다. 

 

내가 파트타임 일을 계속 하고 있을 당시인지 아니면 그만둔 이후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젠가 혼자 또다시 어렵고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어노인팅 목요예배를 찾아갔다. 나는 예배에 깊이 빠질 준비가 되어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예배가 시작했고 이내 숙련된 찬양팀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로 들어가는, 듣기만해도 벅찬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을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손을 들고 눈을 감고 소리쳐 찬양했다. 아! 저 높은 하늘과 이 모든 자연을 지은 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인간을 굽어살피는 신의 그 섬세함은 또 얼마나 놀라운지, 저 높고 영화로운 존재를 마음껏 찬양했다. 내가 가지고 갔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높으신 그 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던 중 문득 나는 그 모든 감격을 무색하게 만드는 한 생각에 부딪히고 말았다.

 

"저 높고 영화로운 존재가 오늘의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는 거지? 내 사소한 생활들과 일상의 괴로움이 그 높으신 분과 도대체 무슨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거지?"

내가 계속해 손을 높이 들어 찬양하고 경배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이미 내 마음은 그 순간 손을 내리고 경배를 멈추었다.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게되었다. 그분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녔고, 독일에 유학을하러 나왔던 십대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던 분이었다. 나는 독일에 오기 전부터 그분을 알고 있었고, 독일에 나와 처음 그를 만나게 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근황을 한참 나누고 나서야 그분이 현재는 교회에 나가고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나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내심 알 것도 같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와 함께 온 일행은 먼저 돌아가고, 집주인과 단둘이 남아 늦은 시각까지 차를 마시며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는 궁금했던 한 가지를 그분께 여쭤봤다.

 

"교회를 나가지 않으시는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혹시 불안하세요? 아니면 편안하세요?"

그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불안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실까? 하나님이 정말 인간과 인생에 간섭하고 계시고, 그 관계가 그분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그분을 떠나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은 마음의 안정을 잃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죄에 빠진" 상태라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과 멀어진 내가 오늘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평온하고 두렵지 않다는게 아이러니하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이 너무나 멀게 느껴지고 한낱 글자에 불과해서 오늘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데 너무나 소홀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일까?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 절박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높고 깊은 뜻에 닿기에는 우리의 지식과 생각이 너무나 얕아서 그분을 몰라보는 것일까? 자기 삶에 안주해버린 내 지인을 탓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그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다시 하나님을 찾도록 도와야할까? 내가 내 문제를 하나님께 세세하게 내놓고 그분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일상생활까지 속속들이 도우시지는 않는걸까?

 

분명히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성경은 줄곧 말한다. 사람의 노력과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오직 그 분이 먼저 찾아오심으로써만 우리는 구원받는다. (해본적도 없지만) 내가 무릎을 찧으며 기도한들, 나무를 열그루씩 뽑아가며 밤새 기도한들, 40일이 아니라 400일을 금식하며 기도한들 내 힘으로는 찾을 수 없다. 오직 그분이 먼저 찾아오심으로써만 우리는 구원받는다. 그런데 왜 말씀대로 체험되지 않는거지? 우리는 오늘 왜 하나님하고 멀어져있고, 그 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분은 왜 그분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서 도움을 주시거나 질책하시지 않는가?

 

세상을 만들고 운행하는 전능자, 혹은 아름다운 꽃과 나무 그리고 인간을 만든 섬세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인 창조자를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어느 종교에나 그런 요소는 있고, 가진 종교가 없더라도 종교심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그정도의 경외감은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필요로하는 것은 그런 추상적인 단계에서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써 뭔가 초월적인 힘을 얻는 듯한 느낌을 받는 정도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 일상(삶이라는 단어도 너무 거창하다) 한 가운데에서 간섭하고 영향을 끼치기를 원한다. 이미 그러고 계시다면 그것을 내가 알기 원한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상의 어려움들에 그분의 손길이 느껴지길 원한다.

 

7년전 신의 존재를 아득히 멀게 느낀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같은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조금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말씀을 되새겨본다. 그는 분명히 초대하는 이시고, 먼저 찾아오는 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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