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된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교회의 유치부 주일학교에서 만났던 것을 우리의 첫 만남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기억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고, 후에 사진으로 보고 기억하는 사실이긴 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연이 이어지고 있으니, 대략 25년 정도 되었으려나. 친구와 나는 각기 다른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그 친구와 그다지 가깝게 지낼 일은 많지 않았고, 옆 학교 무리의 아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첫 해에 같은 반에 속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많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 친구의 집이 학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하굣길에 친구의 집에 들러 놀았던 여러번의 기억도 있다. 그 집과 교회 안팎에서 가끔가다 마주치게 되는 친구의 아버지는 당시 내가 느끼기에 꽤 엄하고 어려운 분이었다. 사소한 행동거지들로 그분에게 지적을 받고 혼이 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니 내가 직접적으로 혼나는 것보단 친구가 훈계를 듣는 것을 더 자주 본 것 같다. 아들의 친구들을 그리 살갑게 대해주는 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가끔 그 어른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던 이유는, 당시 공부를 곧잘했던 나를 여러번 칭찬해주시며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주셨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마도) 중학교 초기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할 때마다 나는 영화감독을 적어냈다. 그 이후에는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영어에 조금 흥미가 생겨 외교관으로도 한동안 적어냈고, 또 이후에도 여러번 바뀌다가 종내에는 아예 장래희망이란 것에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게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독일의 작은 방에서 고민하던 어느 날 밤, 나조차도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영화감독이라는 어린시절의 내 장래희망이 문득 기억났다. 그리고 이 기억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내 친구와 그의 아버지였다. 예상하건대 아들과 관련한 것들이라면 그 날짜까지 기억하는 세심한 우리 어머니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저 둘이 유이하게 내 첫 장래희망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수년전부터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을 조사하면 공무원, 유튜버, 프로게이머와 같은 직업들로 천편일률적인 답이 나온다며 우려를 표하는 기사들을 접했다. 그러나 20여년 전인 내가 그들의 나이였을 무렵으로 돌아가 생각해봐도 사실 그리 다양한 직업군이 조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소방관, 경찰관 등과 같은 직업들을 주로 적어내곤 했으니까. 어디서부터 그 생각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내 장래희망을 영화감독으로 적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나는 조금은 특이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주위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어른들이 내게 장래희망(혹은 꿈)을 묻고 내 답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감독의 정확한 역할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또래들은 그냥 무심코 지나쳤으려나? 어른들은 나의 예술가적인 꿈을 응원해줬으려나? 아니면 좀 더 안정적인 어떤 직업을 추천해줬으려나?
적어도 내 친구는 내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그랬다. 가끔 뵐 때마다 아들의 똘똘한 친구가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곤 하시던 그 분이 언젠가 미소를 머금고 나에게 확인하듯 "꿈이 영화감독이지?" 물어보시던 그 때를 떠올리면, 그 한마디가 어딘지 따뜻하고 잔잔한 응원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당시에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를 특별히 준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영화에 대해 스스로 연구해볼만큼 영화를 보통 이상으로 좋아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어떤 한 영화를 깊이 파보는 열정도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를 창작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을 조금 맛보아 알고 있었고, 여러 분야를 둘러보다가 관심이 조금 가는 영화를 택해 스스로 장래희망을 영화감독으로 정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는 진지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상상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들을 모방하고, 표현하고 싶다는 근원적인 열망을 가지고있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스토리를 정성스레 만들어 직접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때마다 흥분했을 것이고, 살아있는 눈빛으로 세상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는 영화인이 되었을 미래를 그려볼 때마다 설렜을 것이다. 세상을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의 장래"에 이루고픈 현실이었을 것이다. 정작 나조차도 20년 전의 그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뒤돌아보며 그의 생각을 멋대로 재단하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고 치부해버리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어머니, 내 친구 그리고 그의 아버지만큼 그 어린아이의 장래희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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