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학원을 다녀와서 오후에 한시간 정도 산책을 다녀왔다. 동네 뒤 언덕으로 올라가보면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농경지인 것 같은데, 그 사이로 난 길들을 따라 다른 마을로 넘어갈 수도 있고, 좌측으로 크게 돌아 다시 지금 마을로 돌아오는 방법도 있다. 이번에는 우측 숲이 있는 쪽으로 가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고, 그 안으로 또 잘 펼쳐져있는 "Wald Weg"을 발견했다. 자연 속을 걸으며 약간은 더운 날씨를 느끼기고 했고, 마주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삐뚤어진 내 자세 때문에 어딘지 걷는게 불균형하게 느껴져서 발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다르게 시도해보기도 했다. 근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언덕을 오르고, 숲길을 걷고, 벌레를 쫓은 모든 시간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온통 홀로 생각하며 걸었는데 말이다. 하나 떠오르는 건 내가 산책을 출발하기 전 잠시 누워 쉬면서 유튜브를 통해 본 피식대학의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상상했다는 점이다.
지난 수년간 타임어택을 하듯 하루하루 일정을 짜고 살아왔다. 나는 항상 해야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사이드프로젝트도 "해야하고", 개인 공부도 "해야하고", 책도 "읽어야하고", 필라테스와 PT도 빠지지 않고 "해야했다". 나는 항상 안심하지 못했다. 모든 일정은 항상 무리하게 짜여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지런한 삶의 동기는 지금 스스로를 진단해볼 때, 불안이다. (나의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니 여기서는 적고싶지 않다.)
이렇게 살아오던 방식을 지금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다. 요즈음은 일상에서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는데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대신 삶의 공백을 늘리고 다시 "생각"이란걸 해보고자 하고 있다. 아무 콘텐츠도 듣지 않고 단순히 설거지를 하는 행위에 집중해보기도 하고, 날이 좋은 날 창문을 열어두고 그냥 가만히 있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항상 의도한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관성적으로 무언가 보고 듣는게 익순한 나는 식사를 하며 또 유튜브를 틀고 콘텐츠를 소비하고, 학원을 다녀와 몸이 조금 지칠 때면 또 콘텐츠를 소비하는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다. 유튜브로 유머 컨텐츠를 소비하는게 그렇게 생산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냥 "내가 그것이 가장 좋다면" 그렇게 하는데에 굳이 죄책감은 안 느끼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소비한 컨텐츠가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서, 그 이후에 나의 "공백" 시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기좋고 풍경좋은 자연 속을 걸으면서 계속 나의 현생과는 상관이 없는 피식대학의 컨텐츠를 상상했다. 내가 하고싶은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한다면 더 좋은 산책길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을 조금만 바꿔준다면, 이는 또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서 나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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